사상에는 오늘의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성과 참신성이 있다. 그가 파헤쳐 보여주고 있는 마음의 세계와 화쟁의 논리, 그리고 자유인의 몸짓 등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선다.
원효는 스스로 어둡고 긴 밤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이기도 염원했다. 7세기의 신라에서 원효
사라고 불렀다 하며, 고선사 서당화상탑비에 의하면 원효의 별칭으로 고선대사, 만선화상이 있었으며, 구룡, 백부론주 등의 칭호도 있고, 입적한 뒤에는 고려시대 숙종에 의하여 화정국사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고려시대의 대각국가 의천은 원효보살 또는 원효성자라는 존칭을 썼다.
원효불기조에
사이에 벼루를 놓고 집필했다는 저술배경에 일화도 많은 「금강삼매경소」, 원효사상의 중심 개념인「화쟁」을 풀이한「십문화쟁론」 등은 다행이 남아있다. 그리고 원효철학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연구저작으로는 「대승기신론소」를 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승기신론」는「금강경」